서울에서 출발해서 충남 예산 수덕사에 도착하니 눈이 내렷답니다. 알록달록한 단풍과 흰눈의 조화로 눈이 호강을 한 날이기도 하네요.
하여간 수덕사 내에 수덕여관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응로 화백이 집을 사서 기거하면서 작품활동을 한 곳이기도 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인 나혜석도 잠시 살다간 곳이라고 전해지고 있네요.
주차장에서 수덕사 매표소까지 이동..11월에 쌓인 눈을 보니 참 신기하네요 ㅎㅎ
수덕사 매표소에 도착..ㅎㅎ
수덕사(修德寺) http://www.sudeoksa.com/
덕숭산 남쪽에 자리잡은 수덕사는 현존하는 백제 고찰의 하나로 창건에 대한 정확한 문헌기록은 없으나 백제 위덕왕(554-597) 재위시에 창건된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청하고 있다. 수덕사는 창건 이후 백제의 고승 혜원스님이 주석하며 법화경 강론을 폈으며,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는 대웅전(국보 49호)이 건립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 와서는 중수기에 의하면 중종 23년(1528), 영조 27년(1751)과 46년(1770), 순조 3년(1803)에 색채보수, 부연과 풍판의 개수등 4차례 보수한 기록이 있다. 1937년부터 1940년까지 만공스님대에는 대웅전 전체를 해체보수하였고 이때 포벽에서는 고려, 조선 양시대에 걸쳐 그려진 벽화가 발견되어 주목을 끌었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벽화의 안쪽에서 발견된 고려 벽화는 주악비천도, 공양화도, 수화도 등이 있었으며, 조선시대 그려진 오불도 등이 있었지만 유실되고 없으며 현재는 그 모사본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사진자료가 일부 전해지고 있다. 현재 대웅전 건물 내부 대들보에 남아 있는 금룡도는 우아한 색채와 생동감있는 필치의 걸작으로 고려 불교미술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개인 성인은 3천냥, 단체는 2천5백냥이네요 ㅎㅎ..하여간 수덕여관은 수덕사내에 있기에 매표를 하고 가야 한답니다. 수덕사와 같이 보신다고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ㅎㅎ
아직도 그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는 늦가을의 단풍들, 그속에서 하얀눈이 내리니 절경 감상하는 제 눈이 다 호강할 정도이네요..감탄이 안나올래야 안나올수가 없는 그런 풍경들이 보여서 좋네요..
수덕사 일주문 왼쪽으로 수덕사선미술관과 수덕여관이 나란히 위치하고 있답니다.
수덕사선(禪)미술관(관람은 무료, 정기휴관은 화요일) 모습, 오른쪽으로 수덕사여관이 있답니다.
오른쪽을 보면 이런 한옥건물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수덕여관이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쳐간 곳처럼 많은 방을 가지고 있는 수덕여관..
수덕여관은 ㄷ 자형의 초가집인데 정며으로 보면 중앙에 출입문을 두고 한편으로 정자와 같은 높임마루를 들였답니다. 마루 밑에는 창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부엌이나 창고로 사용한 것 같고 원형을 복원하였다는 수덕여관은 정면 5칸에, 측면 한편은 6.5칸, 4칸으로 꾸며졌답니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모두 6개의 방이 보이고 객방의 방문앞에는 툇마루로 연결되어 있답니다.
위에서 건물 우측으로 돌아서 가면 입구가 보인답니다. 물론 왼쪽으로 돌아가셔도 마당쪽으로 갈 수 있지만 정식 출입구는 이쪽이겠죠
입구에는 수덕여관이라는 현판이 멋지게 걸려 있답니다. 그리고 우측 돌 개가 보이는데 바로 이응로 화백께서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돌아와서 삼라만상의 성쇠를 바위에 음각한 작품이랍니다.
이응노 선생 사적지
고암 이응노 화백이 작품 활동을 수덕여관과 우물, 암각화를 포함한 일대가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응노 화백은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세계를 접목하는 시도를 한 근현대 미술사에서 중용한 위치를 차지하는 예술가로 국내뿐만 아니라 유럽 화단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수덕여관은 화백이 1944년 구입하여 6.25전쟁 당시 피난처로도 사용하였으며, 1959녀녀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머물면서 수덕사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옮기는 작업을 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수덕사 위쪽에서부터 내려온 좁은 개울물이 집 앞으로 흘러 지나가고 개울 건너편에 여관을 배치하였다. 가운데 안마당을 두고 'ㄷ'자 초가가 감싸고 있는 여관은 일제강점기 때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여관만 아니라면 소담하면서 궁색하지 않은 전형적인 농가 모습이라 하겠다. 후면에는 이응노 화백이 사용하던 우물이 있다.
이응노 선생 사적지를 찾는 사람들은 바위 위에 새겨진 암각화를 먼저 찾는다. 이응노 화백은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고 1969년 사면된 뒤 다시 프랑스로 떠나기 전 이곳에 머물면서 바위에 2점의 문자적 추상화로 암각화를 남겼다. 둘레 17m, 높이 85cm, 또 하나는 둘레 7.6m, 높이 75cm의 바위에 문자체로 그림을 조각하였다. 글자 같기도 하고 사람 모양 같기도 한 것이 역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무엇을 그린 거냐고 묻는 이들에게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며, 영고성쇠의 모습을 표현했다. 여기에 네 모습도 있고, 내 모습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다. 라고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처마끝에 고드름이 죽 있어서 찍어 봤습니다. 11월에 고드름이라니 ㅎㅎ..
방문이 밖과 안쪽 모두 있어서 안밖으로 볼 수 있는 방이랍니다.
입구쪽모습을 멀리서 찍어봤습니다. 기존 한옥과는 다르게 좀 색다르게 보이죠
수덕여관 출입구 안과 밖 모습..
ㄷ자형태의 가옥 마당에 우뚝 서 있는 굴뚝..방이 많아서 이런 굴뚝이 여기저기에 있답니다.
정말 멋진 한옥이죠..초가집형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웬지 작품활동하기에 최적 장소인 것 같기도 하고..ㅎㅎ
하얀 눈이 덮힌 초가집을 보니 한편의 작품인 것 같기도 ㅎㅎ
고드름도 처마끝에 나란히 줄을 서서 매달려 있는 모습도 정말 간만에 보는 풍경이네요.
하여간 이응노화백꼐서 쓰시던 방은 왼쪽 방이랍니다.
이응로화백님의 호가 고암이라서 저렇게 고암선생님이 쓰시던 방이라고 해서 표시를 해 놓았답니다.
충남 홍성군 출생이지만 어린 시절은 예산에서 보내셨다고 합니다. 1923년 당시 경성부에서 유명한 서예가이자 서화가였던 김규진 문하생되어 서예, 사군자, 묵화 등을 배웠고 1924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 묵죽을 출품하여 입선하였으며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도쿄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1938년 제 17회 선전에서는 이왕직상을 수상하였고 1946년 단구미술원을 조직하여 일본 잔재의 청산과 민족적인 한국화를 주창하기도 했다. 1948년에는 홍익대 주임교수로 재직, 1962년 프랑스 파리 파케티 화랑에서 콜라주전을 열였다 1965년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명예상을 차지해 세상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1967년에는 한국전쟁 때 헤어진 아들을 만나기 위해 동베를린에 갔다가 동베를린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프랑스 정부의 주선으로 석방되어 다시 프랑스로 건너갔다. 이 일로 인해 국내 화단과는 단절되다시피 했으며 주로 스위스와 프랑스 등에서 수십 차례의 초대전에 출품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1975년 현대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1977년 문헌화랑에서 신작 무화로 개인전을 열었으나 또다시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국내와는 완전 단절이 되었다.
향년 84세, 1989년 1월 10일 프랑스 파리에서 사명하셨고 사인은 심장마비인 것으로 밝혀졌으며 최종 국적은 프랑스였다.
그리 이 수덕여관은 또 한분의 숨결이 남겨져 있답니다. 바로 나혜석이라는 분이랍니다. 1896년 4월 수원생으로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면서 문학가이고 근대 신여성의 효시이기도 한 분이랍니다. 나혜석의 아버님께서 교육에 있어서는 남녀 차별을 안두셨기에 일본 유학까지 하게 되었고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주제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여성 인권향상을 위해 힘썼고 3.1운동 때는 여학생 참가 계획을 추진하다가 결국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5개월 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답니다.
또한 조선 여성 최초로 시베리아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거쳐서 빠리까지 최초 구미 여행도 하신 분이랍니다. 세월이 흘러 1937년 10월의 소품전 실패와 경제적 궁핍 그리고 아들 김선이 폐렴으로 죽은 후 나혜석은 충격을 받고 방황하다가 수덕사로 찾아오게 된답니다. 그곳에는 김일엽(여류문인 승려)처럼 승려가 되려고 했으나 수덕사에서 받아주지를 않다가 만공 스님에게 고근이라는 불명을 받지만 결국 승려가 되는 데는 끝내 실패한답니다. 그리고 그녀가 수덕사에 있다는 소문이 퍼져 화가가 되려는 젊은이들이 사찰을 찾게 되었고 그 젊은이들에게 유화와 조각등을 가르치게 되는데 그 젊은이들 중에 고암 이응노도 있었답니다. ㅎㅎ 나혜석의 수제자인 이응노가 훗날 파리로 훌쩍 떠난 이유도 나혜석의 여향이 컸다고 봐야 할 듯 싶네요.
젊었을 때는 최고의 삶을 누렸지만 말년에는 파킨스병과 중풍 등이 악화되어 고생을 하시다 행려병자, 무연고자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거대한 나무 두그루가 멋지게 서 있어서 찍어 봤습니다.
아까 언급한 김일엽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하자면 본명은 김원주인데 도쿄 유학시절 춘원 이광수가 전설적인 여류작가 히구치 이치요이ㅡ 이름을 따서 "한국의 일엽"이 되라는 의미로 지어준 이름이랍니다. 그러다가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라는 고 가르친 스승 만공선사의 뜻에 따라 일엽을 법명으로 삼고 펜을 꺾고 30여 년 동안 절필하고 수도와 법문에만 전념했답니다. 그러다가 예순 다섯 살 때 일엽의 글이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된답니다. 특히 1962년 출간된 '청춘을 불사르고'는 당시 일대 파란을 일으켜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답니다.
비구니의 연애담 정도로 생각하고 책을 읽었던 많은 사람들이 그 내용에 감화되어 입산을 하거나 불교에 귀의하는 등 사회적 반향도 만만치 않았다고 합니다.
향년 76세에 1971년 예산군 수덕사 견성암 별실에서 열반에 들게 된답니다. 죽기전에 찾아왔던 노신사 오다 세이조 젊은 시절 서로 사랑하여 결혼까지 결심했던 두 남녀는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한쪽은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집안이였고 한쪽은 임진왜란때 출전한 왜장의 가문였답니다. 결국 이로 인해 일엽은 방황의 세월을 걷게 되다가 수덕사에서 승려가 된답니다. 중간에 일엽이 낳은 아들 마사오를 보게 되지만 이미 승려가 된 후라 오다 세이조와는 결국 결혼을 못하고 헤어지게 된답니다. 그랬던 그가 일엽의 마지막 순간 다시 찾아왔네요..
달마대사가 한 잎의 갈대로 배를 삼아 중국으로 건너간 고사에서 유래한 일엽, 한자루의 펜으로 여성을 일깨운 그녀의 가치는 현대에 와서 더욱 빛나고 있다.
이렇게 수덕사와 수덕여관은 많은 문인들과 예술인들 그리고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그런 장소인 곳이랍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숨결을 느끼면서 수덕여관을 보신다면 겉으로 보이는 건물 외에 많은 것을 느끼고 가지 않을까? 싶네요..
하여간 제가 못찾아서 그런지 아쉽게도 이응노화백님이나 나혜선님 그리고 김일엽님 사진을 찾아볼 수가 없었네요..작품이라도 몇 개 그리고 사진도 걸어 두셨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가져 봅니다.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수덕사의 수덕여관 그 이야기를 잠시 들어보면서 둘러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성철스님께서 말씀하신 말이 갑자기 생각나서 적어 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여러분의 공감과 댓글로 국내여행 오늘의 탑에 올랐네요 감사합니다.더 좋은 여행기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원본 http://blog.naver.com/tmddlf/220556704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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