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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3일 일요일

*충남여행* 예산가볼만한곳, 눈내리는 수덕사(修德寺)


충청남도 예산에 있는 천년고찰 수덕사, 저도 이번에 처음 가는 곳이였는데 눈까지 와서 더 운치있게 둘러본 수덕사였답니다. 고요한 산사에서 잠시 명상에도 잠겨보고 알록달록한 단풍과 함께 하얀 눈까지 본 날이라 정말 좋았던 수덕사와 수덕여관였답니다.

수덕사(修德寺) http://www.sudeoksa.com/
덕숭산 남쪽에 자리잡은 수덕사는 현존하는 백제 고찰의 하나로 창건에 대한 정확한 문헌기록은 없으나 백제 위덕왕(554-597) 재위시에 창건된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청하고 있다. 수덕사는 창건 이후 백제의 고승 혜원스님이 주석하며 법화경 강론을 폈으며,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는 대웅전(국보 49호)이 건립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 와서는 중수기에 의하면 중종 23년(1528), 영조 27년(1751)과 46년(1770), 순조 3년(1803)에 색채보수, 부연과 풍판의 개수등 4차례 보수한 기록이 있다. 1937년부터 1940년까지 만공스님대에는 대웅전 전체를 해체보수하였고 이때 포벽에서는 고려, 조선 양시대에 걸쳐 그려진 벽화가 발견되어 주목을 끌었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벽화의 안쪽에서 발견된 고려 벽화는 주악비천도, 공양화도, 수화도 등이 있었으며, 조선시대 그려진 오불도 등이 있었지만 유실되고 없으며 현재는 그 모사본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사진자료가 일부 전해지고 있다. 현재 대웅전 건물 내부 대들보에 남아 있는 금룡도는 우아한 색채와 생동감있는 필치의 걸작으로 고려 불교미술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주차장에서 본 수덕사 경내 안내도..산등성이에도 암자들이 있기에 거기까지 가볼까 했는데 대웅전까지만 보기로 했습니다. ㅎㅎ



주차장에서 장사하는 길을 지나쳐서 가시면 매표소가 나온답니다. 요금은 개인 성인은 3천냥, 단체는 2천5백냥



단풍 색깔이 아직 죽지 않은 수덕사 단풍들 ㅎㅎ..


여기가 수덕사 일주문이 있는 곳이랍니다. 그 왼쪽으로 수덕여관과 수덕사선(禪)미술관(관람은 무료, 정기휴관은 화요일)이 있답니다.


수덕여관은 따로 작성했답니다. 보시고 오세요 여러 예술인들이 거쳐간 수덕여관, 잠시 들려서 그 이야기를 잠시 느껴 보시는 것도 ㅎㅎ

#충남여행# 이야기가 있는 수덕여관(修德旅館)http://blog.naver.com/tmddlf/220556704407


다시 수덕사 일주문 앞에 섰답니다. 그 뒤로 보이는게 금강문


저기 보이는 문이 금강문이랍니다. 금강문은 일주문과 사천왕문 사이에 있는데 바로 불교의 수호신이랍니다. 즉 사찰을 보호한다고 보시면 되겠네요.


하얀 눈이내려서 묘한 풍경을 보여주네요..늦가을에 눈이 내려 이런 멋진 풍경도 보고 ㅎㅎ


금강문 양쪽에는 이렇게 두 수호신이 사찰을 보호하고 있답니다. 찾아보니 왼쪽에 밀적금강(密迹金剛)이 있고 오른쪽에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 있다고 하네요...나라여금강은 천상계의 역사로서 코끼리힘의 백만배라고 하네요 그리고 무기를 가진 밀적금강은 항상 부처님을 호위하는 야차신이라고 하네요 ㅎㅎ


하여간 또 걸어가면 사천왕문을 지나게 된답니다. 꽤 험상궂게 생긴 사대천왕은 사방을 지키는 호위신..잡귀들이 얼씬도 못하겠죠..
사천왕문을 지나면 거대한 황하정루가 보인답니다.(우측 하단 사진)


그 오른쪽으로 수덕사 성보 박물관이 있는데 시간상 다 못봤네요 ㅎㅎ..

관람 9시 ~ 17시(오전 9시 30분 ~ 11시 30분, 11시 15분 입장마감, 점심시간 11시 30분 ~ 12시 30분, 오후 12시 30분 ~ 17시, 16시 45분 입장마감), 휴관은 월요일


박물관에서 나오다가 문이 이뻐서 찍어 봤네요 ㅎㅎ



황하정루에서 바라본 사천왕문 방향 ㅎㅎ


반대쪽으로 나오면 이런 계단이 보인답니다. 바로 대웅전으로 가는 길이기도 ㅎㅎ


계단을 오르고 보면 황하정루가 멋지게 보인답니다.



돌아서면 경내 모습이 보이는데 앞에 탑이 수덕사 금강보탑이고 그 뒤로 있는게 수덕사 3층석탑 그리고 그 뒤로 있는 건물이 대웅전


수덕사 금강보탑
성역화 중창불사 도중 전탑좌대가 현위치에서 발견되어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탑을 세우고 금강보탑이라고 칭하였다. 금강이란 불괴신의 불, 법, 승 삼보와 계체의 상징으로 이름하게 되었으니 신앙의 대상이다. 이 탑 내부에는 1988년 덕숭총림 방장 원담대선사께서 스리랑카국을 예방했을 때 스리랑카 종정스님으로부터 한스간의 우의를 견고히 하는 뜻으로 부처님 진신사리 3과를 증정하므로 10수년간 친견법회를 거쳐 본 탑에 봉안하게 되었으며 불상 1000불과 탑 모형을 동으로 주조하여 999탑을 소장하기에 이르렀으니 천불천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탑은 국태민안과 세계평화는 물론 청풍납자 속성정각하여 광도중생하여 박복자 복덕구족하여 고통받는 이 모두는 이고득락할 것을 발원하면서 2000년 7월 세우도다.



대웅전 내부는 촬영금지라 멀리서나마 ㅎㅎ..

수덕사 대웅전
백제시대 사찰인 수덕사의 청건에 관한 정확한 문헌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백제 위덕왕(554-597)재위 시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석가, 아미타, 약사 삼존불을 모신 이 대웅전은 1937년 수리공사 때 발견된 묵서의 내용으로 보아 1308년 충렬왕 34년에 건립되었다. 건축은 고려시대에 유행된 주심포 양식이고 정면 3칸, 측면 4칸 규모의 맞배지붕이다. 바른 돌쌓기 형식의 기단에 사각형의 자연석으로 기둥 놓을 자리를 복돋게 조각한 주춧돌을 놓았고, 그 위에 배흘림 기둥을 세웠다. 정면의 각 칸에는 섬세한 빗살 3분 합문이 있고 측면에는 맨 앞쪽에 출입문을 설치하였다. 뒷면에는 각 칸에 문을 장식하고 있지만 중앙 칸에만 문을 달았다. 외부에 노출된 가구는 나무가 간직하고 있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며 측면 맞배지붕의 선과 노출된 목부재의 구도는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건축된 연대가 확실하고 조형미가 뛰어난 점으로 한국목조 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건물이다.



수덕사 3층석탑
이 탑은 신라 문무왕 5년에 건립되었으며 원효대사가 중수하였다고 전해지나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한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기단은 2층으로 위층은 4매의 돌로 면석을 조립하였으며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표현되어있다. 지붕돌과 몸돌은 각각 1개의 돌로 되어 있으며 1층은 5단의 옥개 받침을 하였으나 2,3층은 3단으로 되어있다. 상면에서는 1단의 받침으로 그 위에 몸돌을 받고 있으며 지붕돌은 끝이 치켜 올라갔다. 상륜부에는 보륜만이 남아 있었으나 찰주 보개 복발 노반을 새로 만들어 놓은 상태이다. 상대갑석과 지붕돌 및 3층 몸돌 일부가 파손이 되었으나 전체적으로 균형미를 갖춘 석탑이다.




눈이 와서 그런지 경내도 이쁜 모습이네요..


왼쪽에 범종각이 있는데 종에 새겨져 있는 모양이 멋져서 ㅎㅎ.. 우측으로는 문화새설사의 집과 종무소가 있답니다.


이 건물은 백련당 뒷쪽으로 관음바위가 있답니다. 그 뒤로 산으로 올라가게 되는데 1080돌계단을 밟으면 정혜사까지 간답니다. 아무래도 산까지는 시간상 그리고 진흙탕 길이라 다음 기회로 ㅎㅎ



수덕사에 수행온 스님 같네요..메인 이미지로 쓴 사진이기도 합니다. ㅎㅎ


처마 끝에 길게 늘어져 있는 고드름을 보시면 왠지 추위가 느껴지시죠 ㅋㅋ




스님들의 신발이 대웅전 문앞에 있어서 찍어 봤습니다. ㅎㅎ 내부는 촬영금지라서 ㅎㅎ





사진 중간에 보이는 암자도 가고 싶었는데 ㅎㅎ 다음에 다시 와바야 할 듯 싶네요
참고로 덕숭산 정상쪽에는 사면석불, 소림초당, 만공탑, 관음보살입상, 금선대, 청해사, 전월사 등이 있답니다.


돌아서 나오는데 눈이 녹아서 고인 물에 반영이 보여서 찍어봤습니다. 물에 반사된 탑과 대웅전 그리고 덕숭산이 멋지게 보이네요 ㅎㅎ

참고로 수덕사가 생긴 전설이 있는데 홈페이지에 가셔서 보세요 덕숭낭자와 수덕도령 그리고 버선꽃에 대한 이야기 ㅎㅎ




오늘은 법정스님의 무소유에 대해서 몇 자 남겨봅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때 우리는 보다 홀가분한 삶을 이룰 수가 있다




여러분들의 공감 클릭으로 국내여행 오늘의 탑에 소개되었네요 감사합니다. 더욱 멋진 여행기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원본 http://blog.naver.com/tmddlf/220557389252

#충남여행# 이야기가 있는 수덕여관(修德旅館)


서울에서 출발해서 충남 예산 수덕사에 도착하니 눈이 내렷답니다. 알록달록한 단풍과 흰눈의 조화로 눈이 호강을 한 날이기도 하네요.
하여간 수덕사 내에 수덕여관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응로 화백이 집을 사서 기거하면서 작품활동을 한 곳이기도 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인 나혜석도 잠시 살다간 곳이라고 전해지고 있네요.


주차장에서 수덕사 매표소까지 이동..11월에 쌓인 눈을 보니 참 신기하네요 ㅎㅎ


수덕사 매표소에 도착..ㅎㅎ

수덕사(修德寺) http://www.sudeoksa.com/
덕숭산 남쪽에 자리잡은 수덕사는 현존하는 백제 고찰의 하나로 창건에 대한 정확한 문헌기록은 없으나 백제 위덕왕(554-597) 재위시에 창건된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청하고 있다. 수덕사는 창건 이후 백제의 고승 혜원스님이 주석하며 법화경 강론을 폈으며,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는 대웅전(국보 49호)이 건립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 와서는 중수기에 의하면 중종 23년(1528), 영조 27년(1751)과 46년(1770), 순조 3년(1803)에 색채보수, 부연과 풍판의 개수등 4차례 보수한 기록이 있다. 1937년부터 1940년까지 만공스님대에는 대웅전 전체를 해체보수하였고 이때 포벽에서는 고려, 조선 양시대에 걸쳐 그려진 벽화가 발견되어 주목을 끌었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벽화의 안쪽에서 발견된 고려 벽화는 주악비천도, 공양화도, 수화도 등이 있었으며, 조선시대 그려진 오불도 등이 있었지만 유실되고 없으며 현재는 그 모사본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사진자료가 일부 전해지고 있다. 현재 대웅전 건물 내부 대들보에 남아 있는 금룡도는 우아한 색채와 생동감있는 필치의 걸작으로 고려 불교미술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개인 성인은 3천냥, 단체는 2천5백냥이네요 ㅎㅎ..하여간 수덕여관은 수덕사내에 있기에 매표를 하고 가야 한답니다. 수덕사와 같이 보신다고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ㅎㅎ


아직도 그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는 늦가을의 단풍들, 그속에서 하얀눈이 내리니 절경 감상하는 제 눈이 다 호강할 정도이네요..감탄이 안나올래야 안나올수가 없는 그런 풍경들이 보여서 좋네요..

수덕사 일주문 왼쪽으로 수덕사선미술관과 수덕여관이 나란히 위치하고 있답니다.


수덕사선(禪)미술관(관람은 무료, 정기휴관은 화요일) 모습, 오른쪽으로 수덕사여관이 있답니다.



오른쪽을 보면 이런 한옥건물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수덕여관이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쳐간 곳처럼 많은 방을 가지고 있는 수덕여관..

수덕여관은 ㄷ 자형의 초가집인데 정며으로 보면 중앙에 출입문을 두고 한편으로 정자와 같은 높임마루를 들였답니다. 마루 밑에는 창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부엌이나 창고로 사용한 것 같고 원형을 복원하였다는 수덕여관은 정면 5칸에, 측면 한편은 6.5칸, 4칸으로 꾸며졌답니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모두 6개의 방이 보이고 객방의 방문앞에는 툇마루로 연결되어 있답니다.



위에서 건물 우측으로 돌아서 가면 입구가 보인답니다. 물론 왼쪽으로 돌아가셔도 마당쪽으로 갈 수 있지만 정식 출입구는 이쪽이겠죠
입구에는 수덕여관이라는 현판이 멋지게 걸려 있답니다. 그리고 우측 돌 개가 보이는데 바로 이응로 화백께서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돌아와서 삼라만상의 성쇠를 바위에 음각한 작품이랍니다.

이응노 선생 사적지
고암 이응노 화백이 작품 활동을 수덕여관과 우물, 암각화를 포함한 일대가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응노 화백은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세계를 접목하는 시도를 한 근현대 미술사에서 중용한 위치를 차지하는 예술가로 국내뿐만 아니라 유럽 화단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수덕여관은 화백이 1944년 구입하여 6.25전쟁 당시 피난처로도 사용하였으며, 1959녀녀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머물면서 수덕사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옮기는 작업을 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수덕사 위쪽에서부터 내려온 좁은 개울물이 집 앞으로 흘러 지나가고 개울 건너편에 여관을 배치하였다. 가운데 안마당을 두고 'ㄷ'자 초가가 감싸고 있는 여관은 일제강점기 때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여관만 아니라면 소담하면서 궁색하지 않은 전형적인 농가 모습이라 하겠다. 후면에는 이응노 화백이 사용하던 우물이 있다.

 이응노 선생 사적지를 찾는 사람들은 바위 위에 새겨진 암각화를 먼저 찾는다. 이응노 화백은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고 1969년 사면된 뒤 다시 프랑스로 떠나기 전 이곳에 머물면서 바위에 2점의 문자적 추상화로 암각화를 남겼다. 둘레 17m, 높이 85cm, 또 하나는 둘레 7.6m, 높이 75cm의 바위에 문자체로 그림을 조각하였다. 글자 같기도 하고 사람 모양 같기도 한 것이 역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무엇을 그린 거냐고 묻는 이들에게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며, 영고성쇠의 모습을 표현했다. 여기에 네 모습도 있고, 내 모습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다. 라고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처마끝에 고드름이 죽 있어서 찍어 봤습니다. 11월에 고드름이라니 ㅎㅎ..
방문이 밖과 안쪽 모두 있어서 안밖으로 볼 수 있는 방이랍니다.


입구쪽모습을 멀리서 찍어봤습니다. 기존 한옥과는 다르게 좀 색다르게 보이죠


수덕여관 출입구 안과 밖 모습..


ㄷ자형태의 가옥 마당에 우뚝 서 있는 굴뚝..방이 많아서 이런 굴뚝이 여기저기에 있답니다.



정말 멋진 한옥이죠..초가집형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웬지 작품활동하기에 최적 장소인 것 같기도 하고..ㅎㅎ
하얀 눈이 덮힌 초가집을 보니 한편의 작품인 것 같기도 ㅎㅎ



고드름도 처마끝에 나란히 줄을 서서 매달려 있는 모습도 정말 간만에 보는 풍경이네요.

하여간 이응노화백꼐서 쓰시던 방은 왼쪽 방이랍니다.


이응로화백님의 호가 고암이라서 저렇게 고암선생님이 쓰시던 방이라고 해서 표시를 해 놓았답니다.

충남 홍성군 출생이지만 어린 시절은 예산에서 보내셨다고 합니다. 1923년 당시 경성부에서 유명한 서예가이자 서화가였던 김규진 문하생되어 서예, 사군자, 묵화 등을 배웠고 1924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 묵죽을 출품하여 입선하였으며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도쿄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1938년 제 17회 선전에서는 이왕직상을 수상하였고 1946년 단구미술원을 조직하여 일본 잔재의 청산과 민족적인 한국화를 주창하기도 했다. 1948년에는 홍익대 주임교수로 재직, 1962년 프랑스 파리 파케티 화랑에서 콜라주전을 열였다 1965년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명예상을 차지해 세상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1967년에는 한국전쟁 때 헤어진 아들을 만나기 위해 동베를린에 갔다가 동베를린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프랑스 정부의 주선으로 석방되어 다시 프랑스로 건너갔다. 이 일로 인해 국내 화단과는 단절되다시피 했으며 주로 스위스와 프랑스 등에서 수십 차례의 초대전에 출품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1975년 현대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1977년 문헌화랑에서 신작 무화로 개인전을 열었으나 또다시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국내와는 완전 단절이 되었다.
향년 84세, 1989년 1월 10일 프랑스 파리에서 사명하셨고 사인은 심장마비인 것으로 밝혀졌으며 최종 국적은 프랑스였다.



그리 이 수덕여관은 또 한분의 숨결이 남겨져 있답니다. 바로 나혜석이라는 분이랍니다. 1896년 4월 수원생으로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면서 문학가이고 근대 신여성의 효시이기도 한 분이랍니다. 나혜석의 아버님께서 교육에 있어서는 남녀 차별을 안두셨기에 일본 유학까지 하게 되었고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주제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여성 인권향상을 위해 힘썼고 3.1운동 때는 여학생 참가 계획을 추진하다가 결국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5개월 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답니다.

또한 조선 여성 최초로 시베리아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거쳐서 빠리까지 최초 구미 여행도 하신 분이랍니다. 세월이 흘러 1937년 10월의 소품전 실패와 경제적 궁핍 그리고 아들 김선이 폐렴으로 죽은 후 나혜석은 충격을 받고 방황하다가 수덕사로 찾아오게 된답니다. 그곳에는 김일엽(여류문인 승려)처럼 승려가 되려고 했으나 수덕사에서 받아주지를 않다가 만공 스님에게 고근이라는 불명을 받지만 결국 승려가 되는 데는 끝내 실패한답니다. 그리고 그녀가 수덕사에 있다는 소문이 퍼져 화가가 되려는 젊은이들이 사찰을 찾게 되었고 그 젊은이들에게 유화와 조각등을 가르치게 되는데 그 젊은이들 중에 고암 이응노도 있었답니다. ㅎㅎ 나혜석의 수제자인 이응노가 훗날 파리로 훌쩍 떠난 이유도 나혜석의 여향이 컸다고 봐야 할 듯 싶네요.

젊었을 때는 최고의 삶을 누렸지만 말년에는 파킨스병과 중풍 등이 악화되어 고생을 하시다 행려병자, 무연고자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거대한 나무 두그루가 멋지게 서 있어서 찍어 봤습니다.

아까 언급한 김일엽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하자면 본명은 김원주인데 도쿄 유학시절 춘원 이광수가 전설적인 여류작가 히구치 이치요이ㅡ 이름을 따서 "한국의 일엽"이 되라는 의미로 지어준 이름이랍니다. 그러다가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라는 고 가르친 스승 만공선사의 뜻에 따라 일엽을 법명으로 삼고 펜을 꺾고 30여 년 동안 절필하고 수도와 법문에만 전념했답니다. 그러다가 예순 다섯 살 때 일엽의 글이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된답니다. 특히 1962년 출간된 '청춘을 불사르고'는 당시 일대 파란을 일으켜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답니다.
비구니의 연애담 정도로 생각하고 책을 읽었던 많은 사람들이 그 내용에 감화되어 입산을 하거나 불교에 귀의하는 등 사회적 반향도 만만치 않았다고 합니다.

향년 76세에 1971년 예산군 수덕사 견성암 별실에서 열반에 들게 된답니다. 죽기전에 찾아왔던 노신사 오다 세이조 젊은 시절 서로 사랑하여 결혼까지 결심했던 두 남녀는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한쪽은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집안이였고 한쪽은 임진왜란때 출전한 왜장의 가문였답니다. 결국 이로 인해 일엽은 방황의 세월을 걷게 되다가 수덕사에서 승려가 된답니다. 중간에 일엽이 낳은 아들 마사오를 보게 되지만 이미 승려가 된 후라 오다 세이조와는 결국 결혼을 못하고 헤어지게 된답니다. 그랬던 그가 일엽의 마지막 순간 다시 찾아왔네요..

달마대사가 한 잎의 갈대로 배를 삼아 중국으로 건너간 고사에서 유래한 일엽, 한자루의 펜으로 여성을 일깨운 그녀의 가치는 현대에 와서 더욱 빛나고 있다.

이렇게 수덕사와 수덕여관은 많은 문인들과 예술인들 그리고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그런 장소인 곳이랍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숨결을 느끼면서 수덕여관을 보신다면 겉으로 보이는 건물 외에 많은 것을 느끼고 가지 않을까? 싶네요..

하여간 제가 못찾아서 그런지 아쉽게도 이응노화백님이나 나혜선님 그리고 김일엽님 사진을 찾아볼 수가 없었네요..작품이라도 몇 개 그리고 사진도 걸어 두셨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가져 봅니다.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수덕사의 수덕여관 그 이야기를 잠시 들어보면서 둘러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성철스님께서 말씀하신 말이 갑자기 생각나서 적어 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여러분의 공감과 댓글로 국내여행 오늘의 탑에 올랐네요 감사합니다.더 좋은 여행기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원본 http://blog.naver.com/tmddlf/220556704407